작가 천명관

먼저 천명관이라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고래>라는 이 소설은 천명관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모른 채로 읽는다면 소설을 읽는 내내 당혹감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껏 소설을 읽는데 무슨 당혹감 씩이나 느끼려나 하며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역설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닌 소설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이냐고? 조급해하지 말고 이야기를 더 들어보시라. (소설 <고래> 중에서 이렇게 작가가 직접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있어 오마주를 해보았다.)

우리는 학창시절, 소설의 시점에 대해 배운 것을 기억할 것이다. 1인칭 화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의 시점 등. 이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가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이 말인 즉슨, 작가는 우리에게 마치 옛날 옛날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풀어내는 것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작가는 얘기를 전하는 순간 순간마다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을 좌지우지하는 신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 학문적으로 봤을 때는 내 해석은 짝퉁이고,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단 이 소설이 전형적인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아주 과장해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명관 작가는 소설을 쓰기 이전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였다고 한다. 그러한 이력 덕분인지, 그의 소설은 마치 영화를 보듯이 세밀한 장면 묘사가 뛰어나다. <고래>에서도 이야기 위주의 시나리오 기법을 엿볼 수 있게 하며, 여타 소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명관의 인터뷰

"난 시인이 부러운데. 소설가는 구차하게 사는 거에요. 멋있는 걸 포기하고 길게 쓰는 거죠. 저는 다시 태어나면 3분짜리를 할 거야.

3분짜리 뭐요?

음악."

한 잡지에 실린 천명관 작가의 인터뷰 중 일부를 발췌했다. 예술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비슷하다. 음악, 미술, 문학. 이것들은 창작자들이 고통을 감내해가며 만들어낸 것들이고, 그것들에는 창작자가 하고픈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대중은 창작자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고, 재미를 느끼는 등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런 면에서 이 인터뷰는 천명관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업을 예술을 대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고, 장르를 넘어선 다른 예술들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천명관 작가는 한국 소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소설을 많이 읽는다. 물론 인기있는 소설은 대부분 장르 소설이지만,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영화는 비주얼로, 소설은 스토리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할리우드에 이야기를 공급하는 건 다 소설이다. 최근 할리우드의 변화는 만화에서 가져온다. 만화를 실사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꾼들은 또 다시 어디로 가고 있느냐, '미드'로 갔다.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들은 지금 다 미드 쪽에 있다. 미드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도 스토리 즉, 소설이다. 그런데 한국 소설은 이도저도 아니다.

천명관에게 <고래>가 어떤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세상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는 인간이 원고지 2천 매를 쓰라는 미션을 받았을 때 쓰는 소설이라고. 작가에게 에세이를 요구하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글을 잘 쓰는 전문가들이 많다. 인생은 김난도, 여행은 한비야, 정치는 김어준, 요리는 박찬일.. 작가가 굳이 여기 끼어들이서 경쟁한들 이길 수 있겠는가?


천명관의 인터뷰까지 보고나면 그가 어떤 생각으로 <고래>를 집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고래>가 왜 그렇게 유독 다른 소설들과 다르다는 것인지 대강의 느낌은 올 것이다. <고래>는 시대적으로 3대에 가까운 시기의 서사를 그려내고 있는데, 그 구조가 매우 탄탄하고 흐름이 유려하다. 이 소설을 요약하고자 든다면, 그 어느 하나 버려야 할 사건들이 없고, 줄여도 될 표현들이 없다. 단언하건대, 이 소설은 결코 영화화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영화화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망할 것이다. 455페이지에 달하는 대서사를 단 2시간 내외의 영화로 표현해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과 표현들이 함축되고, 묵살되어버릴 것이다. 진정한 <고래>는 없어지고 관객은 앙상한 뼈만 남은 형태를 보며 공룡을 상상해내듯이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스토리는 : 1부

이 소설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극 중 등장인물이 많은데 확실히 이름이 나오는 인물은 이 소설의 주인공 격인 금복과 그의 딸 춘희다. 소설의 시작은 감옥에서 나온 춘희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춘희란 인물은 왜 감옥에 가게 된 것일까? 이제부터 그 궁금증을 파헤쳐보기 위해 다시 먼 과거로 돌아가야만 한다.

국박집을 하는 박색의 노파가 있다. 박색에다 가진 것도 없던 노파는 젊은 시절 부엌데기를 해주던 주인집의 반편이 아들과 스캔들을 일으키며 쫓겨난다. 여기서 이 노파의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마음에서 불거진 세상에 대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노파는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하지만 말년에 그 노파는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인 주인집 반편이 아들과의 정사로 가지게 된 본인의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둔 돈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다.


그래도 스토리는 :  2부

이 소설의 주인공인 금복이 등장하게 된다. 그녀는 어리지만 도화살이 가득한 요망한 젊은 처녀다. 산속 시골에서 자라나, 세상을 떠돌던 생선장수를 만나 고향을 버리고 도망간다. 생선장수와 함께 건어물 장사를 시작하며 장사의 수완을 발휘해 잘 살아볼까 하지만 생선장수에게 사랑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그녀의 진정한 사랑인 걱정을 만나 살림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걱정은 불의의 사고로 불구자가 되어버린다. 생계가 어려워진 금복은 시내 영화관에서 만난 칼자국의 유혹으로 허영과 사치를 경험하게 된다.

스토리를 사건 중심으로 압축해보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나도 4백페이지의 소설을 다시 옮겨 적어야 할 것만 같다. 앞서 얘기한 사건들처럼 금복은 그녀를 원하는 수 많은 남정네들을 겪어가며 엄청나게 굴곡진 인생을 살아간다. 그녀가 벌이는 사업들도 상대하는 남자가 바뀌어 가면서 흥망성쇠를 모두 경험하게 된다. 주된 내용은 이러하며, 이 외의 이야기들은 중요한 스포가 될 수 있어 뒤로 갈 수록 나는 말을 줄여야겠다.


그래도 스토리는 : 3부

3부에서는 금복의 딸 춘희가 주인공이 된다. 소설에는 나오지만 나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사유로 춘희가 감방을 가게 되었고, 감방 안에서 갖은 고초를 겪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춘희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지만, 세상에는 더 이상 그녀의 출옥을 반겨줄 이가 하나도 없다. 춘희는 본인이 자랐던 고향으로 돌아갔고,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배웠던 벽돌을 만드는 기술을 살려 벽돌을 구워내며 산다. 춘희에게 있어 벽돌은 세상 사람들을 다시 자기에게로 불러줄 매개체가 되리라 믿었다. 마지막 춘희의 행방과 벽돌의 쓰임새는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생략한다.


총평

내가 올 해 읽었던 책들을 보면 유독 작가를 중심으로 선택해 읽은 책들이 눈에 띈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을 읽고 난 그녀의 팬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소설도 궁금했던 나머지 그녀의 최신작인 <종의 기원>도 일었고, 그 이전에 그녀를 유명해준 <28>이란 소설도 읽기 위해 책을 빌려놨다. 정유정 작가는 내가 알고 있는 한 한국문단에서 가장 스릴러를 트렌디하고 재밌게 구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의 소설은 굉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데,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의 갈등관계가 마치 씨줄과 날줄이 잘 엉겨있는 직물을 보는 듯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이번에 읽은 천명관 작가에 비한다면 매우 뛰어난 모범생이 창의력도 겸비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정유정 작가에 비해 천명관 작가는 야생에서 날것의 생생함을 그대로 글로 옮겨놨다. <고래>를 읽고나서 든 생각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대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가 싶어 각종 블로그 리뷰들을 봤다. 그런데 하나같이 공통된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보통 훌륭한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문장력이나, 스토리가 가진 구성력, 이런 것들을 근거로 내어놓는다. 하지만 천명관 작가에게 수여된 평은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이야기꾼' 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작가나 소설가라는 표현보다는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을 읽고나면 마치 조선시대 최고의 입담꾼에게 뒤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에 이르는 이야기를 듣고 난 기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천명관 작가는 일부러 다른 소설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종격투기장에서 그 누구도 선보인 적 없는 유술을 이용해 상대를 유린하는 파이터같은 소설을 써버린 것이다. 아마 <고래>는 올해 내가 읽은 책 BEST에 들어갈 유력한 후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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