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을 처음 봤을 때

청소년 필독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책이 바로 '데미안'이다. 중학교 시절, 필독서로 지정되어 나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20년이 지나 다시 읽어 보니, 과연 내가 읽고 이해했던 그 책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책에 적힌 글자를 그 표면만큼도 이해를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때 읽고 느꼈던 것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데미안'같은 나의 우상 찾기였다. 중산층 네 명의 가족의 첫째로 자라난 내 성장환경은 조금은 싱클레어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프란츠 크로머같이 나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나 혼자 전전긍긍했던 점. 나에게도 데미안과 같은 형이 있다면 크로머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한 의식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데미안과 같은 우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고, 나는 악의 세계에서 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더 악인인 척 하는 불량한 사춘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 때의 나는 '권선징악'이라는 순수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했었다. 이 세상은 나쁜 놈이 오히려 더 성공할 수 있는 사회고, 착하다는 건 바보같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데미안을 두번째 봤을 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에서 나오는 가장 유명한 말이다. 우리 모두는 알에서 나오고자 하는 새이며, 새가 진정한 새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새를 보호해주던 알을 스스로 깨야 한다는 말이다. 싱클레어는 부모가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세계를 깨는 데 데미안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났으나 본인은 유약한 정신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했다. 이 즈음에서 싱클레어는 술을 마시며 방황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그 방황의 끝에서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점점 더 구도자의 모습을 완성해 나간다.

내가 데미안을 두번째로 봤을 땐 대학생이었다. 교양으로 인문학 수업을 들으며 과제 비슷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두번째 읽은 데미안에서는 청소년에서 갓 성인이 된 상태에서 부모의 보호를 '알'로 표현한 것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 알을 깨고 나왔으나 나는 아직도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받는 어린 양이었음을 알았던 것은 덤이고. 하지만 중학교 이후 나의 성장은 겨우 여기까지였다. 내 자신에 대해 깊게 성찰하고, 진정한 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전혀 하지 못했다.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사회에 던져졌을 때 나는 발가벗겨진 채 거리로 내몰린 아이처럼 부끄럽고,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스펙은 부모가 만들어준 허울이었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내가 읽은 책으로 만든 지성은 현실에서는 초라한 티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사회에 나오고 깨달았다.


(p.66)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생의 분기점이다. 자기 삶의 요구가 가장 혹심하게 주변 세계와 갈등에 빠지는 점, 앞을 향하는 길이 가장 혹독하게 투쟁으로 쟁취되어야 하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운명인 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삶에서 오로지 한 번, 유년이 삭아가며 서서히 와해될 때, 우리의 사랑을 얻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가려고 하고 우리가 갑자기 고독과 우주의 치명적인 추위에 에워싸여 있음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것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나쁘고 가장 살인적인 그 꿈에 한평생 고통스럽게 들러붙어 있다.


그리고, 세번째 데미안..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넷. 어느덧 30대의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더 이상 원대한 꿈을 찾아 방황하는 나이도 아니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도 할 줄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타협을 '할 줄' 아는 것과 능수능란하게 밀당을 하는 것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나는 아직 그러한 일에 닳고 닳은 노인이 아니다. 자칫 그런 것에 도취되어 내 자신을 기만하면 그대로 도태되어 버릴 것이다. 현실과 타협한다는 것은 도전의 반대말이요, 안주한다는 것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다. 도전하지 않는 삶은 청춘이라 부를 수 없다. 어찌보면 세번째로 데미안을 읽게 된 이유는 내가 아직 청춘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도전하는 마음으로 데미안을 읽었다.


자아를 찾는 여행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걸 요새 주변에 얘기해보면 그런건 10대때나 고민하는거라며 코웃음친다. 하지만 우리들은, 과연 자아를 찾았을까? 극 중 싱클레어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대학시절까지 자아를 찾아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인물이다. 10대의 극중 인물을 통해 심오한 철학적 문답을 하기도 한다.


(p.76)

내가 물었다. "하지만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유의지란 없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다시, 오직 자기 의지만 확고하게 그 무엇에 쏟으면 된다고 말했지, 그러면 자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건 말이 맞지 않잖아! 내가 내 의지의 주인이 아니라면, 내가 의지를 마음대로 이런저런 데로 향하게 할 수도 없는 것 아니야"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건 내가 그를 기쁘게 할 때 그가 언제나 하는 행동이었다.

"네가 그걸 묻다니 훌륭해!" 하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물어야 해, 언제나 의심해야 하구. 그러나 일은 아주 간단해. 예를 들면 그런 나방이 자신의 뜻을 별이나 뭐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나방은 그런 따위 시도는 안해.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는 거지. (후략)"


꿈이 없는 청년들이 늘어났다고 세상이 떠든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경쟁적인 학업 평가와 허울만 좋은 스펙 쌓기에 내몰린 그들에게 꿈을 꿀 시간과 여유조차 주지 못한 것은 이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꿈을 꾸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언제나 물어야 하고, 언제나 의심해야 한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 것인지, 그 끝에 만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먼 미래의 원대한 꿈을 꾸는 것은 몽상가들이 하는 것이다. 현실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들을 먼저 이루고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꿈은 '무엇이 되는' 형태의 be동사가 아닌, '무엇을 하는' do동사로 구성되어야 한다. 무엇을 '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는다면 그 가치는 그것을 행하는 순간 순간이 목표 달성의 연속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되어 버리면' 그 이후가 없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 슬프지만."

우리가 사랑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슬프지만 살 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사랑없이는 이 세상을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사랑하고, 나의 아내와 딸을 사랑하고, 20년지기 친구들을 사랑한다. 그 외에도 나와 연을 맺고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한다. 나에게 사랑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없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하기도 하겠지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난 사랑없이 살아갈 수 없다.


(p.200)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요새 젊은 층에서 쓰는 말 중에 '관심종자' 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사랑)을 받고 싶어 무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그가 꿈꿔온 이상형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바로 자신의 멘토인 데미안의 어머니다. 쉽게 말해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정서상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싱클레어에게 에바부인은 사랑은 간청해서 되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무리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나를 봐달라며 간청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매력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얘기다. 



책을 덮으며.

배가 대양을 건너기 위해 항해를 할 때, 처음 목표를 지정하고 끝까지 그 길을 고수하면서 가지 않는다. 끊임없이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 나의 위치를 찾고, 지금 뱃머리가 향하는 방향이 맞는지 점검하고 방향을 수정해가며 길을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풍랑에 휩쓸려 처음 목표를 세웠던 곳이 아닌 전혀 엉뚱한 지역에 도착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배를 항해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한번 정해둔 목표를 향해 앞만 보며 달려가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목표를 향해 내가 얼만큼 왔고,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지 반성하고 다시 설계해야 한다. 배가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 점검을 한다면, 내 인생에 있어 '데미안'이라는 소설이 내 인생의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길을 잃은 것 같은 지점마다 데미안이 다가와 내 인생의 방향을 다시 잡게 해주었다. 언젠가 데미안은 다시 읽힐 것이다. 그 날에 지금을 돌아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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