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존경하던 한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동양고전에 대해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비록 한 학기의 수업에 그쳤기 때문에, 그다지 깊이있는 연구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중국의 제자백가 중 유명한 이들이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떠한 배경에서 학문이 발전하게 되었는지 대강의 그림을 그리는 수준까지는 경험을 해봤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는 '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 삼성이 스마트폰의 하드웨어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애플의 아이폰만큼 고객들에게 감성을 자극하는 일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삼성과 애플의 차이에 대한 원인을 '인문학의 부재'로 꼽았다. 스티브 잡스는 살아 생전 기술보다는 심미성에 중점을 두었고, 동양의 철학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한 밑바탕이 아이폰의 성공에 대한 원인이 되었다는 얘기다.

인문학의 인기는 '고전 다시 읽기'라는 행동을 불러왔다. 광고업계에서 유명한 박웅현씨는 고전을 통해 얻은 다양한 통찰들을 <책은 도끼다> 라는 책으로 엮었고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를 얻었다. 그는 마치 어려운 고전들을 무턱대고 읽어내면 모두가 통찰을 얻을 수있을 거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사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원전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와닿을 수 있을까? 장자가 살았던 시기의 '국가'의 개념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서의 '국가' 개념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국가 뿐이겠는가. 정치, 사회, 문화,, 모든 것들이 그 시대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나는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읽으며 다시 한번 동양고전에 대한 의미를 되돌아보았다. 내가 <담론>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번 <그때 장자를 만났다>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을 통해 동양고전 중 일부 내용들을 설명하고 이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반영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강상구 기자가 펴낸 <그때 장자를 알았다>는 본인이 장자를 읽으며 얻은 것들을 그리스신화와 연결지어 해석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점은 분명 색다르고 재미있는 시각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강상구 기자의 '꼰대스러움'이 곳곳에 묻어나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서문을 통해 고백했듯 그는 그가 찾은 정답을 후배에게 강요했다. 후배들 역시 그들의 방식으로 정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치 못했다면서 말이다. 그런 꼰대가 장자를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고백했지만, 본문을 읽어가면서 내가 느낀 건 아직 일말의 꼰대스러움이 아주 흐리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약한 수위라 못느낀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차별적인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포털에서 강상구 작가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그는 'TV조선'이라는 종편업체에서 근무하는 기자다. 내가 바라보는 종편은 편협한 시각에 갇힌 수구(보수)적 집단이다.

어쩌면 종편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상구 기자가 종편에 근무한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고난 이후였다. 저자에 대한 배경을 알게된 게 책을 다 읽고난 후라 책을 읽을 당시에는 다행히 고정관념이 생성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다행히 온전히 책에 대해서만 할 수 있었다.



내 마음에 들어온 구절

(p.25)
어떤 사람이 탈레스에게 물었다. "무엇이 어려운 일인가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그럼 무엇이 쉬운 일인가요?"
"남에게 충고하는 것."
어떤 똑똑한 사람이 더 똑똑한 사람에게 용 잡는 법을 배웠다. 전 재산을 다 털어놓으며 열심히 배웠더니, 삼 년 만에 용을 잡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기술을 쓸 곳이 없었다. (열어구)

->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남에게 충고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말이다. 장기를 두면 흔히 장기판을 직접 두고 있는 선수보다 옆에서 훈수두는 사람이 더 앞 길에 밝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접 장기판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사각형의 장기판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해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가 두는 한 수, 한 수가 때로는 결정적인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하지만 옆에서 훈수두는 사람은 승패에 따른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한 발 떨어져 생각을 하기 때문에 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p.59)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하면서 세상과 치열하게 소통했던 헬렌 켈러가 남긴 글 중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이 있다.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단 사흘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것이다. 첫째 날은 아는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그 얼굴들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마음에 기억한다. 둘째 날은 미술관에 간다. 셋째 날은, 마지막으로 해 뜨는 광경을 보겠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매일 아무 생각 없이 하거나, 너무나 당연해서 아예 하지 않는 일들이다. 그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경이로운 일들이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맺는다. "내일이면 앞을 못 보게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세요.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 작년에 나는 녹내장 초기 판정을 받았다. 녹내장은 안구 내부의 압력이 증가해 시신경을 압박해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병이다. 치료를 안하고 방치할 경우, 실명까지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다행히 병을 발견한 이후, 매일같이 눈에 안약을 넣으며 현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녹내장이라는 병명을 얻게된 직후, 나에게 든 생각은 내가 장님이 된다면? 이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다. 나는 앞을 못보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일상 생활이 정상적으로 하는 게 불가능해질 것이다. 책은 점자책으로 봐야 하며, TV는 소리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안내자가 없다면 집 앞의 슈퍼에 가는 것도 나에겐 매우 큰 모험이고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 가장 큰 걱정이 하나 있다. 지금 자라나는 내 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 내가 지금 시력을 잃게 된다면 나는 우리 딸의 2살 모습 밖에 기억을 못하게 될 것이다. 딸이 자라며 얼마나 예쁜 여자로 자라는지, 커서는 어떤 남자랑 결혼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시력을 잃어 단 하나의 걱정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까르페 디엠(Carpe diem)' 이라는 말이 있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과욕이나 탐욕을 내라는 뜻은 아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놓치지 말라는 말이다. 헬렌 켈러가 "내일이면 앞을 못 보게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세요." 라는 말을 했다. 내일이면 어짜피 앞을 못 보게 될 터이니, 자극적인 시각을 주라는 말이 아니다. 헬렌켈러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미술관에 가고, 해 뜨는 광경을 보겠다고 했다. 지극히 평범하면서 무난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현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과도 같은 것이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스스로에게 되물어봐야겠다. "나는 오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p.63)
역사상 가장 싸움 잘하는 장군이라는 피로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자신이 왜 싸우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중략) 편히 쉬기 위해서 하는 싸움이라면, 싸움을 하지 않는 편이 더 편히 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산다.
(중략)
진실은 가까이에 있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마치 발에 너무 잘 맞는 신발처럼, 평소에는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이미 잘 맞는 신발을 신고 있으면서 자꾸만 더 멋진 남의 신발만 탐을 낸다. 그게 더 눈에 잘 띄니까. 눈 크게 뜨고 잘 보명 내 발에 이미 너무나도 잘 맞는 신발이 신겨져 있다. 중요한 건 내 신발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 피로스 장군은 전쟁을 통해 세력을 넓혀가는 것을 즐겨했다. 아랫사람이 왜 전쟁을 하냐는 질문에 자신의 왕국을 넓히는 것이라 대답한다. 그러면 왕국을 넓힐 수 있는 데까지 넓히고 나면 무엇을 할거냐고 묻는다. 피로스 장군은 그제서야 마음놓고 편히 쉬면서 살겠다고 말한다. 그에게 전쟁의 끝은 '쉼'이다. 이는 수단과 목적의 상관관계가 지극히 떨어지는 논리다. 그는 이미 자신의 왕국을 가진 왕이고, 그가 하고 싶은대로 쉬고 싶다면, 쉴 수 있는 사람이다. 굳이 전쟁을 해가며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물으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 라는 답을 가장 많이 한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행복은 어떠한 수단과 행위의 끝에 오는 결과물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가족과 함께 있다는 것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인 것이다. 이미 사랑하는 가족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엇을 더 추구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신은 신발이 나에게 잘 맞으면 신발의 존재를 잊고 살게 된다. 신발의 존재가 나에게 각인되는 것은 신발이 없거나, 맞지 않거나, 닳아서 불편해지는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들과 함께하는 행복에 대한 가치다.




(p.102)
멘토르는 해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정답은 어차피 없다. 답은 텔레마코스의 마음속에 있다. 그 답을 스스로 찾도록 한다. 멘토의 역할은 그렇게 찾은 답에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답을 찾지 못해 끙끙거리는 사람 중에는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모르는 일이 많다. 더 나아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그래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면 답은 의외로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주변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여기까지다. 인생 좀 더 살아봤다고 섣불리 정답을 제시하는 건 욕심이자 오만이다.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에서 정답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정답일 리가 없다.

-> 아이에게 물고기를 잡아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만 하면 그 아이는 물고기를 잡아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당장 굶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면 스승이 없어도 굶지 않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갈 수 있다. 나도 이제는 회사생활이 7년차가 되면서 배움을 받기 보다 가르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작년에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멘토의 역할을 해주었는데, 그 후배에게 나는 어떤 멘토였을까? 회사에서 설정한 멘토의 의무기간을 마치고 난 그 후배에게 신경을 거의 쓰고 살지 못했다. 그랬더니 그 후배의 업무역량이 생각보다 늘지 않았다는 것을 1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3개월의 의무 멘토기간을 통해 나는 기초적인 업무 스킬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 스킬들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일을 왜 해야 하는지, 그 일을 통해 본인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근원적인 목적 의식을 심어주지 못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후배를 가르치기로 했다. 이번에는 스킬이 아닌 일의 근본을 가르쳐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급적이면 자신이 스스로 해보면서 본인이 그 이유를 깨닫도록 유도해주고 싶다. 왜냐면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와 그 후배가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목적은 직원들마다 다를 수 있다. 본인이 왜 이 일을 하는지 그에 대한 목적은 스스로 깨닫는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 후배에게 나의 업무를 보여주고, 그 업무를 모방하고 자신의 방향을 찾을 때까지 무기한으로 옆에서 봐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있어 풀지 못한 숙제이고, 일련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는 해방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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