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을 맞이해 '당신'에게 바치는 소설

작가에게 있어 나이듦이란 작품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다. 작가 박범신은 어느덧 일흔을 맞이하여 마흔두 번째 장편소설 <당신>을 최근 세상에 내놓았다. 터져오를 것 같은 붉은 색을 뿜어내는 황혼에서 한소끔 지나 짙푸른 어둠과 교차하기 시작하는 나이, 일흔. 작가는 노년과 사랑, 그리고 기억에 대한 글을 썼다.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한 평생의 삶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 그 속에 숨겨진 이면을 조심스럽게 들춰낸다.


박범신의 소설을 그리 많이 아는 편이 않았다. 아니, 사실 이름만 들어보았지 거의 아는 게 없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 <은교>를 통해 원작이 박범신 작가의 것이라는 정도만 아는 정도였으니. 부끄럽지만 이제서야 노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다 읽은 후에 나는 박범신 작가의 팬이 되어가고 있다.


<당신>의 줄거리

2015년, <당신>에서 '당신'으로 나오는 주인공 윤희옥은 마치 오래도록 준비해온 사람처럼 남편의 시신을 조용히 처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윤희옥은 남편의 사망신고가 아닌 실종신고를 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딸과 함께 남편 주호백을 찾기 위한 여행을 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치매에 걸린 남편에 대한 지금의 추억, 그리고 지난 날의 기억을 현재 시점과 과거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윤희옥은 남편 주호백과 첫사랑 김가인에 대해 밝히고 싶지 않았을 관계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김가인의 딸을 배었지만, 주호백과 결혼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 그리고 한 평생 아내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노년에 치매에 걸려버린 주호백. 그런 치매에 걸린 주호백을 일흔 넷이라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주호백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낀 윤희옥. 이야기는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었던 그들의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한 인내의 삶을 조명한다.


치매에 걸린 남편을 간병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제 손으로 남편을 묻은 윤희옥. 그런 그녀가 자신도 치매가 진행되고 있어 남편의 죽음을 잊고 돌아올 리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지낸다.



마음을 사로잡은 구절들


" 그는 평생 동안 나에게 당신의 본심을 감추면서 살아왔다. 울어야 할 때 그는 웃었고, 화가 날 때 그는 침묵했으며, 욕망이 생길 때 그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쳤다."

주호백은 첫사랑의 아이를 가진 윤희옥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한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아내에게 지극 정성의 자세로, 마치 그녀의 노예같은 삶을 살아낸다. 어찌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걸까? 서로가 '공평'하게 사랑하더라도 살아가면서 싸우고, 화해하고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게 부부의 삶이다. 주호백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나의 아내에 대한 사랑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었다. 아무것도 받는 게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했던 주호백. 나는 그 주호백의 사랑에 비해 절반이라도 하고 있는걸까?


" 그는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하나의 인격은 자애와 헌신과 인내로 시종한 관용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의 인격은 상처와 분노와 슬픔 등 보편적 희노애락을 날것으로 갖고 있는 얼굴이다. 거의 평생 나와 인혜에게 그는 첫번째 인격으로 대응했으며, 이 방에 들어와 혼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두번째 인격의 실체와 맞닥뜨리거나 그것의 해방을 경험했을 터이다. 때로 혼자 울고, 때로 분노를 참지 못해 주먹으로 벽을 치고, 또 때로 그 모든 감정을 가지런히 하려는 고통스러운 내적 투쟁과 정면으로 마주쳤겠지. 치매가 깊어진 다음 그가 보여준 그 본능적 반응들. 이 방에 간직된 것들은 그러므로 그가 환자가 되기 전 한사코 감춰온 그의 이면에 대한 생생한 증거들이다. 한 지붕 아래에서도 그는 두 개의 인격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 그로 인한 내적 분열을 거듭해왔다는 뜻이다."

그래,, 주호백이 성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의 일방적인 사랑이 주호백의 모든 모습이 아니었다. 그도 헌신적인 사랑을 해주는 한편,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상처와 분노, 슬픔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뒷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다행히 그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다락방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호백과 나의 공통점은 일기를 통해 내면을 풀어낸다는 것. 나의 일기야 이것 저것 많은 주제들로 채워지는데, 일이든 사랑이든, 사람관계든.. 상처가 생겼을 때 그것을 털어놓는 일기가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난 그래서 주호백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나도 위로받고 싶으면서도 끝내 가면을 쓴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을.


" 당신 가슴속을 좀 들여다보구려. 평생에 걸쳐, 거기, 당신 가슴속에 내가 집 하나를 지었소. 고대광실로다가. 죽은 다음에도 들어가 살 집. 당신 가슴속인데 당신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지어서 미안해요. 미웠던 적은 있었지만, 당신과 헤어지고 싶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소. 그런 점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참, 아무것도 후회하진 말아요. 후회하면 당신 가슴속에 지은 내 집이 무거워질 거요. 아이고, 그 집이 무거워지면 당신, 무슨 수로 걷고 춤출 수 있겠소. 당신은 춤출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

주호백이 아내에게 바치는 마지막 고백이다. 작가의 표현이 너무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는 헌신적인 외면을 보여주면서 내면으로는 자신을 항상 가슴속에 담아주길 바라는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거칠고 직선적인 남자의 고백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시적인 표현을 통해 우회하고 있다. 




책을 덮으며.

사랑을 주제로 한 책은 무수히 많이 읽은 것 같다. 풋풋한 사랑을 겪을 10대 때부터, 열렬한 사랑에서 사랑의 아픔을 겪어봤던 20대, 그리고 결혼 후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 30대. 이제는 사랑을 다룬 소설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박범신의 소설은 무엇인가 달랐다. 일평생을 통해 정제해온 사랑의 순수한 결정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 사랑이 겪어야 할 모든 고통을 감내했다. 그 과정이 주는 감동은 기존에 내가 알았던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이나 사랑에 대한 감정을 풀어낸 소설과는 달랐다.


소설 <당신>의 마지막에 나오는 윤희옥이 부르는 노래 소절을 적으며, 후기를 마친다.


"꽃잎보다 붉던 내 젊은 시간은 지나고,

기억할게요, 다정한 그 얼굴들.

나를 떠나는 시간과 조용히 악수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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