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

인문학으로 떠나는 가장 먼 여행.

보통 소설책은 막 불타오르는 연애의 감정으로 읽게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더 빨리 읽고 싶고, 손에서 내려놓기 너무나 아쉬운 그런 감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뜨겁게 읽어내버리고 끝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 읽고 난 후에는 '정말 재밌었어' 하는 추억의 장으로 넘겨 곱게 갈무리를 하는 것으로 매조짓게 된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읽을 때는 마치 결혼 후 부모님을 찾아뵙는 마음으로 읽어냈다. 출가 후 간간히 찾아뵙는 부모님은 나이듦이 눈에 보여, 조금이라도 젊은 모습을 내 마음속에 각인하고픈 마음에 오래두고 천천히 보고싶고, 오늘 본 내용을 마음 속 깊이 새겨두고 싶다.

더 이상 신영복 선생님의 새로운 책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그 분은 나에게 책을 통해 스승의 자리에 계신 분이다. 조금 더 일찍 그분을 알고, 살아 생전 그 분의 강의를 청강이라도 해봤음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드는 마음이다.



내 마음에 들어온 구절


(p.200)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어린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전의 아득한 미래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 미래 역시 아직은 꽃이 아니라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동안 고전 강의는 다루지 못한 것이 많고 또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미흡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전은 태산이라고 합니다.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p.209)
나는 같은 추억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힘겨운 삶을 이어 왔을 그들에게 청구회에 대한 추억이 나의 것과 같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p.226)
<한 발 걸음>을 함께 읽기로 하겠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한 발'이란 실천이 없는 독서를 비유한 표현입니다. 감옥에서는 책 읽고 나면 그만입니다. 무릎 위에 달랑 책 한 권을 올려놓고 하는 독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시루에 물 빠져나가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지만, 사오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야 이미 읽은 책이란 걸 뒤늦게 알아차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책 제목마저 기억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독서가 독서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실생활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독서이기 때문입니다. 화분 속의 꽃나무나 다름없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실천'이 제거된 구조입니다.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한 발 보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258)
마지막으로 교도소는 인간학의 교실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공부하는 것이 '사람'공부입니다. 인생의 70%가 사람과의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공부가 쌓여서 어느덧 인간에 대한 공부로 비약합니다. 사람 공부가 인간학으로 비약하려면 우선 수많은 만남과 공부를 통하여 내공을 쌓아 가야 합니다. 그것을 내공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많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이 복잡하기도 하고, 보여주는 모습도 천의 얼굴입니다. 여러 경우의 사람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조금씩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p.284)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앞둔 여인이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I really conceived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인간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답변입니다.


(p.324)
~만남으로 채워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종착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변화된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비단 여행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면 여행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과 변화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부단히 만나고, 부단히 소통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행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렇고, 우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인문학 교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329)
여행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전 과정이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리 멀리 이동하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만났더라도 진정한 여행은 아닙니다.


(p.337)
오늘날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예로서 반드시 콜럼버스가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계란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계란을 책상 위에 세우지 못하는데 콜럼버스만이 계란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단지 발상의 전환에 관한 일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란의 모양은 어미 닭이 체온을 골고루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형의 구적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트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p.343)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karma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부정적 집합 표상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representation)은 인간의 인식활동입니다. 우리는 남산을 바라보지 않고도 남산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대상과 격리되어 있지만 대상을 재구성하는 인식 능력입니다. 대상은 그에 대한 1개의 표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표상 즉 집합표상으로 구성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고유의 집합표상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 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란 점에서 카르마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이 바로 '카르마의 손損'입니다. 카르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그 시대가 청산되지 못합니다. 봉전제의 집합표상이 청산되지 않는 한 프랑스 혁명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 한사람의 개인은 물론이고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면 부정적 집합표상인 카르마를 청산해야 합니다.

(p.418)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 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 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ㅇ느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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