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10대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1학년 때, 이과로 갈지 문과로 갈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장래희망에 대한 첫 고민을 하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늘 '수포자(수학포기자)'는 일정비율로 존재해왔고, 그들은 수학이나 과학이 싫어 문과를 지원했다. 나도 문과를 지원했지만, 나는 수포자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문학을 좋아했고, 나름 또래들에 비해 독서량도 많은 편이었다. 시험기간에도 소설책 한권을 몰래 읽는 재미가 참 쏠쏠했다. 아직도 그 당시 눈물을 흘리며 읽었던 현진건의 '무영탑'이 생각난다. 수능의 노예라 불리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어도 난 언제나 언어영역이 제일 재밌었다. 언어영역에서 제시문으로 나오는 글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고나 할까? 문제를 푸는 건 부차적인 것이었고, 다양한 글을 감질맛 날 만큼만 제시해주는 게 아주 나를 안달나게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난 책이랑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내에 도서관이 따로 있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마치면 도서관에 모여 앉아 독서카드의 리스트를 채우는 재미로 살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등교를 해서 하교를 할 때까지 공부는 안하고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부보다는 책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나의 10대 시절은 소위 '문학소년' 이라는 칭호가 부족하지 않을 학생이었다.


수능을 마치고 전국의 수험생들은 3개의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있었다. 나는 '당연하게' 국문학과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국문학과를 나오면 취업을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경영학을 배우길 원했다. 그래서 국문학과를 지원한 학교는 상향지원을 했고, 국제통상학과를 지원한 학교는 커트라인에 달랑말랑한 곳으로, 관광학과는 살짝 하향지원을 했다. 역시나 국문학과는 탈락했고, 국제통상학과는 현실성 없는 대기합격, 관광학과는 합격이었다. 난 그렇게 관광학도가 되었다.


20대 초반, 가치관을 세우다

스무살의 나는 가치관이 상실된 시기였다. 수년간 대학 입시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이미 목표는 완성되었고, 그 이후를 살아갈 목표나 가치관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군 입대 전까지 일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잉여로운 시간을 보냈다. 술 마시고, 연애하는 데 나의 모든 젊음을 불태웠다. 방황을 많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군 입대 전까지 시한부 인생을 판정받은 환자처럼 살았으니까 말이다. 미래를 꿈꾸기 보다는 현실의 재미를 추구하는 돼지처럼 살았다.


2년이라는 군 생활이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나의 인생 가치관을 세웠던 시기이기도 하고, 2년동안 7백권의 책을 읽으며 마음 그릇의 너비를 양껏 키울 수 있었던 시기였다. 군 전역 후 했던 유럽 배낭여행, 호주 워킹홀리데이, 토익공부 등이 군 시절 계획했던 일들이었다. 내 인생의 로드맵을 구성했고, 군 전역 후 향후 몇년은 로드맵 대로 실천만 하면 별다른 고민이 없을 듯 했다.


20대 후반, 더 깊은 진로에 대한 고민

2008년 하반기는 4학년 2학기를 맞으며 취업을 준비하는 시즌이 되었고, 세계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금융 경제가 무너지는 시즌이었다. 안그래도 좁은 취업문이었는데, 그 시절 모든 기업들은 신규 채용의 문을 더욱 좁혔다. 아니, 아예 닫아버렸다. 나의 가치관을 실현시켜줄 도구인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본 시기다. 나의 전공인 관광학을 살려 취직을 할 수 있는 모든 관광업은 경제위기로 취업의 문을 굳게 닫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속 여부도 불투명해보였다. 그래도 대학시절의 전공을 무시하는 진로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명 대기업 계열의 호텔에도 원서를 내보고, 대기업 케이터링 업체나 식음료 기업에도 원서를 내봤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시작했던 취업시도는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까지 이어졌다. 얼마있음 눈이 내리는 계절이 올텐데, 그 전까지는 취업에 성공하고 싶었다. 가을부터는 전공이고 뭐고, 아무데나 막 찔러넣기 시작했다. 평소에 가지도 않던 성당에 나가 기도도 했다. 내가 감사하게 일 할 수 있는 자리 하나만 찾게 해달라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대기업 계열사 중에 객실 관리하는 곳으로 운 좋게 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그 성공은 반쪽짜리였다. 그래도 감사했다. 나의 열정을 다해 기업에서 인정받으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취업한 곳은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는 대형 건설그룹의 계열사였다. 정장 자켓 왼쪽 가슴에 자랑스럽게 회사 뱃지를 달고 다녔다. 대기업이란게 원래 그런 곳인 건지, 건설업체 특유의 성향인건지 신입사원에 대한 트레이닝은 매우 혹독했다. 혼나고 속상한 마음에 밖에 나가 담배를 피다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다 지나고 나서 든 생각이다. 그 시절의 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이 이어졌다. 


기업 연수원을 운영하는 자리에 있다보니 다양한 기업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교육이 이뤄지는 현장을 보았다. 나와 같은 신입사원부터, 머리가 희끗한 부장급, 임원분들도 교육을 받으러 들락거렸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꾸준히 교육을 받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공부는 평생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시기였다. 지금도 내가 종종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그 때 경험한 것들이 자산이 되어주는 것 같다. 직장이라는 조직은 바다와 같다. 그 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헤엄을 쳐야 한다. 힘들고 지쳐서 물길질을 안하고 쉬면 그 바다 속으로 가라 앉게 되는 것이다. 


첫 직장을 가지면서 취미로 삼게된 것이 매월 월급받는 주 토요일에 서점에 가서 맘에 드는 책 서너권씩을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달동안 그 책들을 읽으며 다음달까지 버텼다. 첫 직장을 일년 반 정도 다녔는데, 일년 반동안 읽었던 책들은 주로 경영과 자기계발 서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욱 생산성 있는 직원이 될지, 시간관리는 어떻게 하는게 좋은지, 문서작성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 신입사원이 열심히 대리급의 퍼포먼스를 익히고자 하는 욕구가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나의 이상을 향한 책들도 섭렵했다. 전략기획, 인사, 재무 쪽 책도 많이 읽었다. 이 시기에 읽었던 책들 덕분에 다른 직원들보다 '기업'이라는 본질 자체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어진 것 같다. 회사의 정책과 변화에 대해 불만을 가지기 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재빨리 나의 이득에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했다. 이 시기엔 소설 책을 읽는 것은 부질없게 여겨졌다. 실무에 필요한 스킬을 연마하고, 현상을 관찰해 본질을 파악해 수치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남들 살아가는 이야기는 나에게 득이 될 게 없었고, 감성에 충실한 문체들은 이성적인 판단에 걸림돌이라고만 여겼다.


이직, 새로운 진로를 찾다

2010년이 밝아오면서, 경제 위기는 완만한 복구가 되는 중이었다. 다시 여행사 채용의 문이 열렸다. 나는 지난 일년 반동안 쌓아온 실무감각을 무기로 이직에 성공했다. 연봉은 대기업의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보다 모자른 돈이지만, 정규직 일자리였다. 작년에 유행한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가 했던 자조적인 질문. "이대로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이 말이 내내 나의 마음 속에 있었다. 아니, 가망성은 없었다. 기업을 이해하면 이해할 수록 비정규직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돈은 적지만, 안정적인 정규직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직업이었다. 


여행사에서는 고작 신입사원이었지만, 나름 대기업의 업무를 일년 반동안 트레이닝을 받은 '즉시전력감' 선수였다. 부서의 기획업무를 맡으며, 일개 신입사원 시절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부서의 월별 실적 평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연간 목표배분 작업을 수행했다. 익숙한 일이었고, 재밌었다. 행사 유치와 의전도 기업 연수원에서 수도 없이 했던 업무였다. 크게 다를게 없는 업무였다. 아니, 오히려 여행사는 지난 대기업에서 했던 것보다 규모도 작았고, 체계가 명확하지도 않았다. 내가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기획업무와 함께 맡은 건 마케팅이었다. 전통적인 마케팅이라기 보다는 상품 판촉 마케팅을 주로 담당하는 역할이었다. 여행지를 소개하는 브로셔를 제작하고, 웹의 상품을 관리하는 MD의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나의 독서 편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마케팅 업무를 맡게되면서 알게된 점은, 마케팅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이해 라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의도적으로 내가 읽는 책의 절반을 소설에 투자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진로와 가치관

진로와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나의 지난 삶을 쭉 돌아보는 글을 쓰게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 가치관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가치관이라는 것은 수학처럼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수 많은 해가 나올 수 있지만, 가치관을 올바른 방향으로 정립하느냐에 따라 오답이 존재하기는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가치관이 '나만 잘 살면 돼' 라고 설정되었다면, 이는 오답이다.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가치관이 정립되었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써 진로를 탐색해봐야 한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꿈이라는 것은 'be'동사가 아닌 'do'동사로 표현해야 한다고 한다. 

I will be a doctor. - 난 의사가 될거야. 라는 꿈은 본인이 의사가 되는 순간 꿈이 이루어진 상태가 되어 버리고, 의사로서의 소명가치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꿈을 상실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I will take care of sick people. - 난 아픈 사람을 돌봐주는 사람이 될거야. 라는 꿈은 직업으로써의 '의사'는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의사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꿈을 지속적으로 이뤄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치관이 진로 탐색에 앞서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양한 진로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의 의사 이야기를 계속 예를 들어 설명을 하자면,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나의 사명(이뤄야 할 가치)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의사가 되어도 이룰 수 있지만, NGO기구에서 일하게 될 수도 있고, 간호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론이 실전을 앞선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시대의 젊은이라면 인생의 가치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를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 점수를 쌓고, 인턴 경험을 쌓고,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것은 나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닌, 나의 본질이 투영된 현상을 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속 얘기했듯이,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릇을 키우는 방법으로 제일 쉬운 것이 '독서'인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독서가 가장 큰 힘이다. 경험은 그 뒤의 일이다. 어르신들이 젊었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해보랬다고 해서, 무작정 아무 거나 경험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해봐야 할 경험이 나의 가치관 실현에 얼만큼 부합되는지 알아보는 과정으로써 해보는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야 뭐가 자신에게 맞는지 알 수 있다고? 물론,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기엔 짧다. 기보지 못한 길을 꼭 가봐야지만 나의 길인지 판단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다양한 공부가 필요하다. 다양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독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젊은 날에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을 읽고.



자기혁명

저자
박경철 지음
출판사
리더스북 | 2011-10-05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대한민국의 지성, 실천하는 비판가, 열정적 독서광, 청춘의 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2015년 9월에.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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