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을 사게 된 이유
올해 연간 프로젝트 중 가장 공을 들였던 것 중 하나가 드디어 끝났다.
너부 비싸지도 않고, 너무 싸지도 않은 것 중에서 하나 골라 '나에게 주는 선물'을 하고자 했다. 그렇게 내가 고른 것은 만년필과 잉크!
글은 써야 늘고, 직접 종이에 글씨를 한자 한자 쓰는 것이 글쓰기 실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키보드로 쓰는 글은 아무래도 깊이에 있어 손글씨만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 하지만 생각보다 손글씨 쓰기는 여간 공이 들어가야 하는게 아니고, 조금만 귀찮아도 우선순위에 밀려 잘 쓰지 않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만년필이라는 것이 아주 오묘한게, 글씨를 막 쓰고 싶게끔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다. 만년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명언이나 유행가의 가사를 쓰는 일은 아주 흔하다. 써야 할 컨텐츠는 없지만 그래도 막 쓰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대신 해결해주니까.
그만큼 만년필은 뭔가를 쓰게 만드는 능력 하나만은 인정하는 바이다. 메모를 통해 다양한 사고를 필요로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만년필은 그의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줄 것이다.
파이롯트 커스텀74를 선택한 이유
작년 이 맘때쯤 만년필 필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아주 대중적인 만년필로 알려진 라미(LAMY)사의 사파리(safari)라는 브랜드의 만년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3~4만원 정도에 살 수 있는 저가형 만년필이다. 값이 싸다고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독일제의 라미 만년필은 만듦새나 필감이 가격에 비해 성능이 월등히 뛰어난 이른바 가성비가 좋은 제품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라미 사파리 만년필은 촉이 스틸로 구성되어 있다. 만년필을 많이 써본 사람들은 스틸이 아닌 금 촉을 썼을 때 필감이 색다르다는 평을 한다. 그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만년필을 또 사게 만든 것이다.
파이롯트사의 커스텀74는 우리나라에서 구입할 수 있는 금 촉의 만년필 중 가장 저렴한 편에 속하는 만년필이다. 비슷한 일제 브랜드로는 플래티넘이나 세일러가 있으며, 가격대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내가 정말 원했던 브랜드는 독일의 '펠리컨'이라는 브랜드였으나, 가격이 비싸 눈물을 머금고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이리저리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일제 만년필 중 가장 가성비가 좋은 녀석이 뭘지 한참을 돌아봤다. 그리하여 낙점이 된 것이 바로 파이롯트 커스텀74. 그 중에서도 SF닙이라 하여 경성 만년필에 연성의 느낌을 더 했다고 하는 그런 촉으로 선택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낭창낭창한' 느낌을 마구마구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제 만년필이 워낙 세필이라 굵기에 있어 내가 원하는 느낌의 굵기보다 한단계 더 굵은 걸 선택하라는 조언을 따랐다.
나의 커스텀74
인터넷에서 일본 구매대행을 해주는 사이트에서 8만9천원을 주고 샀다. 결제일에서 배송을 받은 날까지 휴일 포함 6일만에 도착했으니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드디어 만년필 개봉박두!! 가장 설레는 시간^^
박스를 열어보니 검은 만년필의 자태가 비닐에 쌓여져 있다.
펜 뚜껑에는 SF닙이라는 표시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검은 색 바디와 금색 장식이 아주 멋드러지게 어울린다.
내가 커스텀74만년필을 사게 된 결정적인 이유! 바로 금으로 만들어진 닙(nib). 역시나 고급스러움이 한껏 내뿜어진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고 있던 라미 사파리 만년필과 비교 샷! 바디의 전체 길이는 라미 사파리보다 살짝 긴 느낌이다. 그리고 두께는 살짝 두꺼우며, 광택이 흐르는 게 라미 사파리보다 훨씬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기본적으로 들어있던 검은색 카트리지를 장착하고 라미 사파리 펜과 글씨를 비교해봤다. 연성느낌의 SF닙이라 그런지 아직 글씨를 쓰는데 여간 어색한게 아니다. 원래 잘 쓰지도 못하는 글씨가 더욱 꼬부랑 글씨가 된다. 역시 이 '낭창낭창하다'는 느낌은 실제로 써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글씨를 쓸 때 힘을 주면 저렇게 닙이 살짝 벌어져 글씨가 굵어진다.
글씨 두께는 라미와 파이롯트 펜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주 살짝 커스텀74 펜이 굵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로 그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일제 만년필이 가늘게 나온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이번에 만년필과 같이 사게 된 파이롯트 이로시주쿠 잉크. 잉크병의 생김새가 워낙 이뻐서 선택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사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잉크의 색이다. '심해'라는 이름을 가진 잉크의 색은 이름 그대로 깊은 바다의 푸름을 나타내는 색이다.
잉크를 살 때, 검은색도 아니면서, 푸른 색도 아닌 것을 사고 싶었다. '남색'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색이 오묘해 계속 쓰고 싶게 만드는,, 그런 느낌을 원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시필을 해보고 싶어 검은색 카트리지를 끼기도 했고, 잉크를 담을 컨버터도 아직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저 잉크를 써보는 것은 좀 기다려야 할 듯 하다.
총 평
10만원도 안되는 가격에서 이런 고급스러움을 낼 수 있어 정말 만족한다. 금으로 된 닙의 부드러움과 낭창낭창함을 경험하게 된 것은 정말 행복 그 자체이다. 이 펜으로 많은 이야기를 써 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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